로마 외곽의 교황의 여름 휴양도시 FIUGGI라는 곳에서 3일간의 로마 투어기간동안 묵을 숙소에 짐을
풀고 일박을 한 다음날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나폴리와 폼페이 관광을 나섰습니다.
나폴리는 로마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약 3시간 가량 달려야합니다.
폼페이는 나폴리를 지나서 약 30분 정도 더 소렌토 방향으로 이동해야합니다.
나폴리항구 도시를 지나 폼페이로 향하는 고속도로 저편으로 비운의 도시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베수비오화산은 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의 유럽 유일의 활화산입니다.
베수비오산 정상을 보고싶어 위성사진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 가 있으며, 소마산
(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外輪山)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火口原)이 펼쳐지고, BC 8세기에 분화(噴火)했다고 하며, 63년의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서기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는데 이 참사는 영국의 작가 E.G.리턴이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잘 묘사하고있습니다.
매표소 뒤로 2천여전 폼페이의 전성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당시 화려했던 건물들의 잔해속으로 입장하는 길있습니다.
폼페이에서 당시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도시의 법원이자 경제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고 합니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는데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습니다.
폼페이 현장에는 이처럼 도시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전시해두고 있습니다.
당시 화산폭발로 목숨을 잃고 화산재에 묻혀 본격 발굴이후 발견된 사람화석까지 이렇게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고있습니다.
각종 생활용기들과 도구들도 그당시 문명수준을 가늠하게 해줄만큼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있으며 특히 사육되던 개로 보이는 화석이 인상적입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 다소 닮은 사람의 화석은 당시 화산폭발의 악몽속에서 공포에 떨며 비명을 달리한 사람의 화석이 절명하는 마지막 순간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시규모는 현대 어느 도시 못지않게 아주 크며 정교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광객의 신분으로 당시 이도시의 참상을 둘러보는 것까지 흥미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때 그 참상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앞에서 같은 인류로서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습니다.
뒤로 보이는 유적 잔해는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인 제우스 신전의 유물로서 신전 안에는
제우스, 헤라 그리고 미네르바의 3신상이 있었다고합니다.
들개들은 그당시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먹이를 찾다 쉬다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도시에서 이 남자 성기모양의 심벌이 갖던 의미는 요즘으로 치면 환락가를 상징하는 방향표시였었다고 합니다
잘정비된 마차길과 인도는 현대도시를 방불케하는 계획도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벽화는 지금으로 치면 윤락가 혹은 집장촌 내부 장식 벽화라고 합니다.
외설적인 체위를 묘사한 당시 벽화는 수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 항구도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집장촌 문화 수준을 짐작케해주고있습니다.
당시 벽화가 보존된 집장촌의 서비스 룸의 돌침대 내부 모습입니다.
벽에도 남성 성기 모양의 심벌을 새겨놓아 요즘으로 치면 손님을 유인하는 간판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르렀을것으로 추정합니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며,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서기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가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결국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리면서 약 천육백년가량 무덤처럼 역사속에서 묻혀버리게됩니다.
공중 목욕탕이었을것으로 추정되는곳에 발견되어 전시된 사람화석입니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가 완전히 화산속에 덮여버리는 폭발 이전에 몇차례 경고를 했었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한 순간에 손써볼 겨를도 없이 고대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미라의 형상으로 화산재에 뒤덮혀 최후를 맞게 되었다고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화산대폭발을 예고하는 현상이 초기에는 식수원 고갈,물고기떼의 이상현상등으로 발견되어 로마로 보고되고하였지만 원인분석을 적시에 하지못하여 이처럼 엄청난 재앙을 맞이하였다고도합니다.
폼페이 도시 한켠에 있는 원형 극장입니다.
원형 계단 정중앙에 공연 무대가 있는 형태인데 2천여년전 로마인들의 과학기술과 문화수준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큼 대규모 시설이었습니다.
폼페이 마지막 관람코스를 모두 끝내며 나오며 머릿속에서
현대 문명에 비교해도 절대 손색이 없는 당시 문명의 수준높음에 경탄을 금할수 없었으며 사람의 삶이란것이 자연재해앞에서 일순간 잿더미로 바뀌어 버린 현실을 목격하자 부질없는 인생이 얼마만큼 덧없는것인가하는 상념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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