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새벽 3시 집을 나서 고향으로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직업의 특성때문에 2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마을이었습니다.
유년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고향은 늘 마음의 안식을 갖게해주는것 같습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과거에는 4시간30분가까이 걸리던 길이 이제는 면목동 본가 기준173km로 2시간 남짓 소요되었습니다.
마을 어귀 연못가에 자리잡은 수령 300년생 참나무입니다.
이 참나무 그늘 아래서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고 단오날이면 커다란 동아줄로 그네를 달아놓고
행사를 하였던 기억이 살아오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연못은 고향마을의
지명(틀모산이라고 부르며 자랐는데 민속사학자들에 따르면 기제가 원명이라고 함) 유래를 잉태한 곳이라고합니다.
기제란 저수지가 있는 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을로 들어선 후 아직도 남아있는 마을앞산 아래 작은 텃밭으로 가보았습니다.
이곳은
고향집터 방향 조망이 가장 좋기때문입니다.
30여평남짓한 이 텃밭이 당시 우리집에서 소유한 유일한 토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봄소풍때
이곳을 지나 앞산으로 이동하던 친구들이 이밭에 심어져 있던 작물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작물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저는 어린마음에
안타까워 안절부절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인솔하시던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다 본 고향 집... 지금은 고추밭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습니다.
작년인가에 법원경매로 이땅을 새로 인수한 지주가 집을 헐었다고 했습니다.
증조부께서 일제시대 털못확장을 하며 수몰예정지로 편입된 집터를
내주고 남의 땅위에 집을 새로 짓고 이주를 하시면서 살기시작해 제가 중학교3학년때 점촌읍내로 이사를 갈때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집이 있었던 자리라도
다시 보고싶어 아쉬운 마음에 옛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보았습니다.
지금은 누군가해놓은 엉성한 시멘트포장이 뒤덥고 있는
이 길은 추억속에서는 제법 가파르게 보였던 오르막이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언덕길을 수도없이 오르고 내리며 학교도 다니고 ..소나 염소를
몰며 ... 지냈던 30여년전이 엊그제 같은데 길은 낮설고 황폐화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을 헐며 버려진 기와장만이 이곳 저곳 밭둑에 뒹굴뿐 집 앞에 서있던 호도나무와 집뒤안의 살구나무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과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가운데 마루를 기준으로 좌우에 각각 부억이 딸린 안방과 사랑방을 갖춘 일자형
구조로
되어있던 기와집의 안채와 소마굿간과 화장실이 들어 있던 아랫채에 대한 추억만을 반추하며 자꾸만 밀려오는 허전함을 달래다
왔습니다.
집터에 딸린 이 밭 역시 남의 소유였는데 해마다 소작댓가로 도지라고 부르던 임차료를 지불하며 콩과
옥수수,고구마,목화를 경작하였었습니다.
뙤약볕아래서 콩밭을 메며 무성한 잡초를 힘겹게 뽑아내던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집앞 셈터 자리는
미나리 재배를 하는 주민의 쉼터로 바뀌어있었는데 아직도 셈물은 시원한 물줄기를 멈추지않고 맑은 물을 뿜어내고있었습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전에는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사용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세수나 목욕까지 이곳에서 해결해야만 했었습니다.
얼굴이며 목줄기에
송알송알 맺힌 땀을 셈터에 앉아 씻어보았습니다. 한여름밤이면 이곳에서 동네 처녀들이나 아주머니들까지 서로 망을 봐주면서 목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길 안쪽으로 소작을 하던 밭 가장자리에는 지금은 베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큰 감나무가
세그루있었습니다.
동수감이라고 부르는 당도가 뛰어나고 알이 굵은 감나무 한그루와 막감나무 두그루였는데 나무둘레가 어릴적 몇아름을
했을정도였으니 수령이 꽤되었던것 같습니다.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고향집에 대한 향수를 찾아 기웃거리던 발길을 돌려 시옹골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 깊은 골에 모셔진 산소를 찾았습니다.
저멀리 증조부모님
내외분의 산소를 시작으로 조부님산소에 우거진 잡초들을 차례대로 예초기의 힘을 빌려 제거하는데 걸린시간은 두시간
남짓이었던것같습니다.
집터에 딸린 밭 한쪽에 모셔진 산소에는 마치 돌보는 후손이 없는것처럼 무성한 잡초들로 뒤덮여있었습니다.
예초기를 이용해 그리
길지않은 시간에 금초를 끝내자 세월의 무게만큼 하염없이 내려앉은 봉분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엄숙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다음 산소로
이동했습니다.
공평이라고하는 마을 앞산에 모셔진 12대 선조의 선영이라고 합니다.
4대를 모시는 제례에
따르면 더이상 관리를 하지않아도 되기는 하지만 선조의 선영임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수없어 매년 이렇게 함께 금초를 하고는
하였습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5촌 당숙께서는 가을쯤 파묘후 화장을 해서 유골을 당신대에 거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5촌당숙과 당숙모님이 모셔진 상주함창의 선산입니다.
이 임야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 대를
이어서 이루어지지않는 바람에 이 동네사람이 배나무과수원으로 무단점유를 하고 있다가 상주 문경간 국도확장 공사중에 발견된 분묘 덕분에 이 땅이
우리집안 소유라는 것이 밝혀져 선산으로 활용하게된곳입니다.
벌초를 모두 마치고
귀가준비를 하며 초등학교를 찾아보았습니다.
담장 넘어로 보이는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아담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텅빈 운동장이 지금은 전교생을 모두 합해바야 과거 한학년 만큼도 되지않는 모교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중3때 틀모산에서 읍내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살았던 사춘기때 집터도 도시계획 지구로 편입되면서
웃채와 아랫채 모두 사라지고 편도 2차선 사거리로 변해있었습니다.
작은 소공원으로 변해버린 읍내 집터를 바라보고있노라니 그위로 부서지는 어둠만큼이나 마음이
심란해져왔습니다. 성장기 고향에 대한 추억의 단서를 모두 잃어버린 현실이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고향은 언제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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