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우리

역사기행 - 황토현

자연인206 2006. 8. 3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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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 귀가길에는 겸사 겸사 정읍을 잠시 들렸습니다.

다솔이 다운이의 외할머님의 어머님, 그러니까 외증조모님(?)께서 아직 고향집에 계시기도 하여 인사도 드리고 고향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는 집사람 고향친구 집도 들릴겸 해서였습니다.

외가로 서둘러 가자는 집사람의 성화를 달래어 동학혁명의 유적지들을 먼저 둘러본후 가기로 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만석보(농사에 필요한 물길을 관리하던 곳)터 입니다.

 

동진강이 흘러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던 고부 들녘은 호남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습니다. 당시 서울 사람들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자식 하나 잘 길러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소원을 이뤄 조병갑은 1892년 1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수세를 더 걷기 위해 동진강의 탈 없는 보(湺)를 놔두고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하나 더 쌓아놓고 그 명목으로 700석의 수세를 거두고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의 트집을 잡아 2만 냥을 빼앗았습니다.

 

뿐만아니라 태인군수를 지낸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구실로 천 냥을 강제 징수하는등 온갖 토색질을 일삼다가 조병갑은 1893년 11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는데도 고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재임운동을 벌이며 수탈을 계속한 결과 민생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분개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전봉준 장군 생가터 가는 길에 있는 전씨 문중의 기념비가 모셔진 곳입니다.

 

 

여기가 바로 생전에 전봉준 장군께서 기거하시던 곳이라고 합니다.

바로 옆 민가에서 사시는 할머니 한분께서 정부보조를 받아 생가터를 관리하신다고 했습니다.

 

전봉준 장군께서는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았다고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키가 작아 '녹두'라 불렸고 그 때문에 후일 녹두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향교의 장의(掌議)를 맡을 만큼 배움이 있었으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훗날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못이긴 백성들의 대표로 관가에 소장(訴狀)을 냈다가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으로 한 달만에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전봉준은 약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서당을 열어 훈장 노릇도 했습니다. 그는 다섯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 '논이 서 마지기에 불과 했으며 아침에는 밥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는' 빈농의 처지였습니다. 그는 조상의 묘자리를 봐주는 지관에게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고 합니다
.

 

 

전봉준 장군 생가 마루에 걸터 앉아보았습니다.

그날의 아픔은 뜨거운 늦여름 날씨로만 전해져 올뿐 고요한 생가의 빈방에서는 침묵만 흐를뿐이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해진 다운이는 투정을 시작했지만 엄마도 언니도 무관심할뿐이었습니다.

 

 

전봉준 장군 유적지 주변에는 식당이 있을것이라는 짐작이 빗나가는 바람에 오후 3시가 다되어갈 무렵에서야 면소재지에 있는 중국요리집을 찾았습니다.

 

장날이 아니어서 인지 가게 문은 열어놓았지만 드나드는 손님이 많지않아서 주문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서야 요리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의 가격표는 십수년전 고향 읍내 장터에서 보았던 음식값이 떠오를만큼 저렴하여 웃음이 절로 베어나왔습니다.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말목장터입니다.

이곳은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로로서 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이 고부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사발통문을 돌려 포덕 35년(1894년) 1월 10일 새벽 수천명의 농민들을 집결하게 한 곳으로 동학혁명 초기 혁명군의 진지로 이용된 중요한 장소입니다.

 

말목장터는 만석보(萬石洑)에서 서쪽으로 약 2km 정도, 고부관아까지는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당시 매월 말목장날(끝이 3일과 8일로 끝나는 날)이면 각종 생활필수품과 농산물을 팔고 사는 장이 서는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생긴 형상이 말의 목부분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항시장(馬項市場)이라고도 불리었다 고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전봉준 장군이 모여 든 동학혁명군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난뒤 그곳에 서 있던 감나무에 기대어 앉자 감나무 가지가 보호하려는 듯이 아래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말목장터에서 나와 부근에 조성해 놓은 동학혁명 기념관(http://www.donghak.go.kr/)을 찾았습니다.

약 3500여점에 이르는 각종 자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 되어있어 당시 상황묘사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좌측 정면에 전시되어있는 말목장터의 감나무 유물입니다.

이름 내세우기 좋아하는 어떤 지역 유지가 콘크리트로 나무 옆에 정자를 짓는 바람에 80년대 후반 뿌리부터 썩어 들기 시작하다가 2003년 태풍 매미에 의해 끝내 쓰러져 동학농민군들의 최후 모습처럼 사지가 잘린형상을 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박물관에 박제처럼 내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기념관은 제1 전시실과 제2전시실 그리고 기획전시실로 되어있습니다.

각종 시청각 자료들과 풍부한 해설및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어 충분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 관람하기에 좋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대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내 관군의 포로가 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군의 모습에는 비장함만이 느껴질뿐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공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혁명때 산화해간 농민들의 원혼을 기리는 진혼관 내부 전경입니다.

사방이 유리처럼 반사가되는 시설물로 되어있어 스스로의 모습이 마치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멀티미디어 영상관입니다.

 

 

당시 관복과 군복을 재현해놓은 마네킹앞에서도 다솔이 다운이의 장난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비록 웃음속에서 마친 기념관 관람이었지만 다솔이 다운이가 만들어 내는 하트처럼 녹두장군의 큰뜻만큼은 우리 다솔이 다운이가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여기며 기념관을 떠나왔습니다.

 

1895년 4월 23일 전봉준 장군은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분의 처형을 지켜본 일본군 형리는 "그의 청수한 얼굴, 정채 있는 이마와 눈, 엄정한 기상, 강장한 심지(心地)는 과연 세상을 한 번 놀라게 할 만한 큰 위인, 대영걸로 보였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 전봉준 장군의 유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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