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진정한 선장은
침몰하는 객실을 끝까지 지키며
꽃다운 아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구조하려고
사지를 선택하다
영면하신
말단직원 고 박지영,
참 스승 고 남인철 선생님이십니다...
아름다운 두분이
최후의 순간에도 주검으로써 남겨주신
사랑과 감동의 희생정신은
온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놓아
진도앞바다의 차가운 바닷물에서
구조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실종자들에게도
밖에서 기적의 생환을 염원하는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을
심해깊은곳까지 전달하여 희망을 포기하지않게 해줄것입니다.
300여명의 승객들이 객실에 갇힌채 수장되는 와중에
구명보트에 올랐던 무책임한 세월호의 선장못지않게
사고수습과정에 보여준 공권력의 오합지졸은
우리를 더 슬프게합니다.
실종자 가족들을 방문했었던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분들...
제발 더 신속한 조치로 실종자들을 구조해달라며
단상아래에서 무릅을 꿇고 흐느끼는 가족에게 달려가
함께 무릎을 꿇은채 부둥켜안고
옷깃으로나마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꼭 그렇게 해드리겠다며 위로해주지못했을까요...
만일 대통령이 그렇게 실종자가족들과 함께 오열하며
정부의 부실한 관리책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도
현장 구조대의 구조활동이 지금처럼 이렇게 답답함을 계속 보였을까요...
이번 참사로 안타깝게 희생되신 고인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두분은
세상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삶을
세상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운 삶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고 박지영님
고 남인철 선생님
두분과 같은 시대에 살수있어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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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큰헤이드호의 전통
영국처럼 훌륭한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는 그 국민이 긍지를 가지고 지켜 내려오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영국에서는 '버큰헤이드 號를 기억하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났을 때 그 배에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이나 승객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하고 속삭인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다.
일찍이 인류가 만들어 온 많은 전통 가운데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전통도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읻. 하지만 또 이처럼 고귀한 전통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은 실로 인간으로서은 최대한의 自制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백 20년 전, 1852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영국해군의 자랑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사병들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백 30명으로, 그중 1 백 30명이 부녀자 였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킬로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오전 2시 한 밤중의 일이었다.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대번에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부서진 판자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그 사이를 벌벌 기어 갑판으로 나가려는 사람, 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때 파도에 밀려 배가 다시 한번 세게 바위에 부딪쳤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선체의 앞부분은 이내 바닷속으로 침몰되었으나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船尾 쪽으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생명은 이제 문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선상의 병사들이라고 해야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되는 사관들조차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이들 뿐이었다. 남아 있는 구조선은 3 척밖에 없었는데 1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백 8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그 海域은 사나운 상어가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반토막이 난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속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더 심해만 갔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선객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이제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선객들은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이 없을 때의 훈련시처럼 민첩하게 집합하여 열을 정돈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한쪽 편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 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관병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 위로 옮겨 타 일단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머리도 모두 물속으로 숨어들었다. 얼마 후에 몇사람이 수면 위로 떠 올랐왔다. 용케 물속에서 활대나 나무판자를 그러쥘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날 오후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4백 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그는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큼지막한 판자에 매달려 있었는데, 가까이서 두 선실 보이가 죽어가고 있는 모양을 보자 판자를 그들에게 밀어 주었다. 판자 하나로는 도저히 세 사람이 매달려 있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두 보이 대신 자진해서 물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 중의 하나인 91 연대 소속의 존 우라이트 대위는 나중에 이 사건현장이 목격담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바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 마디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라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들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버큰헤이드호>의 이야기는 영국은 물론 곧 전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져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그전까지는 배가 해상에서 조난될 경우 흔히 저마다 제 목숨부터 구하려고 큰 소동을 벌이곤 하였다. 그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곤 하였던 것이다. 힘센 자들이 구명정을 먼저 타고 연약한 兒女子들이 남아 죽어야 했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에 이 <버큰헤이드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후로 수많은 인명을 살려낸 것이다.
이 전통은 얼마 전 다시 한번 그 가치를 발휘하였다. 역시 영국군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호>가 어느 날 아침 6시경 알제리아 해안 약 80킬로미터 해역을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日出을 구경하려고 일찍 일어난 승객들은 그 순간 갑자기 갑판이 흔들리면서 배가 튀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검은 연기줄기가 깨어진 나무틈 사이로 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우르릉 하는 울림 소리가 배의 중앙부에서 들려 왔다.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선객들에게 밑의 艙口로부터 한 선원이 비틀거리며 올라왔다. 그는 이미 머리털과 눈썹이 타 없어졌고 한쪽 뺨이 불에 익어 벗겨져 있었다.
"불이야!"하고 그 사내가 외쳤다. "보일러실이 폭발했소!"
그리고 나서 그는 갑판 위에 쓰러져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 보일러실에 있던 다른 3명의 선원은 이미 죽어 버린 다음이었다. 보일러실에서 일어난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번져나갔고 금방 배 중앙부는 불길에 휩싸였다.
선원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불길을 잡거나 끌 방도를 강구하였다. 장교들은 갑판 위로 몰려 나온 선객들에게 안정하기를 당부하고 있었다.
윌리엄 윌슨 선장은 이미 불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질식한 듯한 시커먼 연기가 배를 감쌋고 불길은 사방에서 붉은 혀를 널름거렸다. 윌슨 선장은 최후의 단안을 내려 배를 포기하도록 명령했다.
인명구출작업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비관적이었다. 승객과 선원을 합하여 그 배에는 총 1천 5백 1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 여자가 1백 25명, 어린이가 87명 그리고 병약자가 17명이었다. 사용가능한 구명정은 12척이었다. 많은 구명정과 구명대가 불길 저쪽에 있었던 것이다. 구명정은 여러 종류여서 정원이 49명부터 1 백명까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구조대상은 전체 승객에 비해 극히 제한된 숫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역시 물고기밥이 될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승객들은 모두들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명정이나 구명대로 뛰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선군대 사령관 로버트 스코트 대령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금 우리는 <버큰헤이드 연습>을 실시중에 있습니다. 누구든 갑판 위에서 움직이지 말고 서 계십시오. 구명정 지정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승객 중의 흰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부인이 남편인 영국사관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말 그대로 연습이 아니라오. 영국에서는 연습이란 말이 훈련을 의미하오. <버큰헤이드 연습>이란 다시 말해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이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오."
그 사관은 자기 부인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부 알려 주지는 않았다. 이 말은 배를 포기할 극한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사용되는 말로서 부녀자를 모두 구명정에 무사히 태울 때까지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 위의 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훌륭히 지켰다. 군인들이 갑판위에 정렬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 민간 선원들은 연기속에서 절반 장님이 된 채로 자기 위치를 지켰다. 구명정 담당 선원들이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인도하여 구명정에 태웠다. 대열에 서 있는 남편 혹은 아버지들은 구조선이 늦게 도착할 경우 그동안 아내와 자녀들이 몸을 덮는 데 쓰게 하기 위하여 웃옷을 벗어 구명정 쪽으로 던져 주었다.
이윽고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병약자들이 모두 구명정으로 옮겨 탔다. 그런데 구명정에는 약간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문제는 병사들과 선원들 중에서 누구를 그 구명정에 태울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사관 한 사람이 '어떤 순서로 사람들을 태울까요?"하고 사령관에게 물었다. 스코트 대령은 이와 같은 비상시에 적용해 온 영국의 오랜 규칙을 생각해냈다.
"물론 장례식 순서를 따라야지. 제일 젊은 사람부터!"
사관들이 사열을 하면서 젊은이들을 지명하여 구명정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지만 병사들은 침착한 행동으로 질서를 잘 지켰다. 마지막 구명정에 정원이 다 타고 났을 때 갑판 위에는 아직도 약 3백 명의 군인과 선원들이 남아 있었다. 구명정들이 母船을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들은 전형적인 영국 군인의 자제력을 훌륭히 발휘하여 마음 속의 감정을 조금도 들어내지 않았다.
윌슨 선장은 배를 돌아다니며 혹시 낙오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의 복장은 이제 걸레쪽이 되어 있었고 구두도 불에 타서 창이 떨어져 나가 발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나무통, 판다 그리고 무엇이든 물에 뜨는 물건은 모조리 바다로 던지게 했다. 부하들과 선원들이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코트 대령이 병사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上衣와 구두를 벗고 바다로 뛰어내려라. 그러나 누구든 결코 구명정으로 헤엄쳐 가서는 안된다!"
불길에 쫓긴 병사들은 차례차례 물로 뛰어들었따. 한 늙은 갑판선원은 의자들을 밧줄로 묶어 물에 빠진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는 임시구명대를 골몰하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그도 물로 뛰어들어갔고 그뒤를 따라 스코트 대령과 윌슨 선장이 마지막으로 배를 버렸다.
사람을 가득 태운 구명정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을 유혹하는 듯 떠 있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곳으로 가는 병사는 없었다. 명령대로 무엇이든 물 위에 뜨는 나무조각들을 붙잡고 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곁의 사람들을 떠받치고 있기까지 하였다.
"당황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의 자제력은 과연 훌륭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었다."
윌슨 선장은 후에 그때의 상황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공교롭게도 사건 현장 주위에는 다른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8시 15분 경이었다. 저만치 구명정 위에서 요란한 환성이 터져 올랐따. 저 멀리 수평선 위에 한 화물선이 이쪽으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30분 뒤에 다른 배 3 척 또 나타났다.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구조에는 조심성과 시간이 요청되는 법이다. 10시 15분에 최후의 생존가자 구출되었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의 불덩어리가 된 선체는 그때 물속으로 완전히그 모습을 감추었다.
결과적으로 처음 보일러 폭발 당시 사망한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버큰헤이드 연습>이 성공한 것이다.
버큰헤이드 전통을 이야기함에 있어 저 유명한 <타이타닉 호>의 비극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1912년 4월 14-15일의 일이었다. 북대성양을 항해하던 영국의 초호화판 정기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쳐 선체가 크게 파손되었다. 2천 3백 명이란 엄청난 수의 승객이 이론봄의 항해를 즐기고 있을 때 돌발한 불의의 사고였다. 떼죽음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승객들과 선원들은 버큰헤이드의 전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불문율을 어김없이 지켰다.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명사들이 최하등 선실의 이민가는 가난한 부인들을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였다. 보일러실과 기관실을 맡고 있던 37명의 기사들은 모두 죽는 순간까지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몰사하였다. 7명의 樂士들은 침몰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찬송가를 연주하였다. 그들 역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승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천 5백명의 건강한 남자가 비참하게도 모두 水葬되었다.
버큰헤이드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있었던 때문이었다. 자제와 용기―이것은 비상시에 직면할 때마다 영국 국민들이 충실히 지켜내려온 자랑스런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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