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우리

한라산 그리고 이태리 빨치산가 "바람과 함께"

자연인206 2008. 7. 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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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하 장편연작 서사시 '한라산' 중에서

 

..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 지휘하고 있었던 그 날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안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 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단이 열일곱도 안 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 날,바로 그 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빨갱이다!"

"빨갱이의 종말은 이렇다!"

광장을 가득 메운 도민들에게 허수아비의 졸개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대검으로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하게 찢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도민들은

저 건 이덕구,저 건 김운민,저 건 김병남,남진,박남해……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푸주간에 걸린 짐승일 뿐이었다

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 간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해안에서 불어 오는 모랫바람이 한라산을 미친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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